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찬양을 통한 영적인 능력` (찬양을 통해 치유된 사례들 )

이 성민 2010. 11. 22. 01:47

 

      ◑ '찬송 생활의 권능' (찬양을 통한 영적인 능력)

                            (멀린 R. 캐로더스 목사님)

 

 

 

▶ 짐의 아버지는 30년 전부터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이 30년 동안 짐의 어머님과, 그 후 짐의 젊은 아내까지, 하나님께 그를 고쳐 주시기를 기도했으나, 명확한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짐의 아버지는 그가 술 마시는 것을 별로 문제 삼지 않았고, 그에게 종교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에게 마다 화를 내며, 그 자리를 떠나 버리는 것 이였습니다.

어느날 짐은 나의 설교에서,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환경을 변화시켜 줄 것을 요구치 않고, 범사에 하나님을 찬양할 때 역사하시는 능력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짐은 그날 그것을 녹음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의 친구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짐은 바로 그 테이프에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가 한번도 아버지의 상태를, 하나님께 찬양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흥분해서 그는 아내에게 그의 생각을 이야기 했습니다.

 

“여보, 아버님이 술 마시는 것을 주님께 감사합시다. 그러한 아버님의 상태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보다 멋진 아버님의 삶이 되는 것이니 주님께 찬양합시다.”

 

그날 그 시간 이후, 그들 부부는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의 모든 것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저녁때 그들은 벌써 새로운 전율과 소망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짐의 부모는 늘 하던대로 만찬을 함께 하였습니다. 전에는 아버님이 늘 가능한 한 일찍 떠나려 했으며, 항상 저녁식사가 끝나는 대로 나가버리곤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차를 마실 때에 충격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런 예수 혁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니?” 아버님은 짐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으셨습니다. “어제 저녁 뉴우스에서 조금 들었는데, 아편 중독자가 약을 끊었다던데 그것이 일시적인 변덕이니, 아니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니?” 그들 부모는, 그 문제로 인해 오랫동안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유로이 토론을 한 후, 그날 오후 늦게야 짐의 집을 떠났습니다.

 

몇 주일 안되어 짐의 아버지는 그의 음주문제를 생각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기도를 한 후, 완전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가족과 어울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생기는 권능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짐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30년 동안이나 아버지 마음을 돌이켜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 아버님 실태를 찬양한 것은 단 하루 뿐이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주님을 찬양하라.'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은, 우리 대다수가 늘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웝스터 사전을 찾아보면 ‘찬양하다’라고 하는 단어는 ‘칭찬하다. 찬미하다. 갈채를 보내다. 인정하다.’라는 뜻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찬양한다’는 말은, 어떤 것을 '인정'하여 확고히 믿는다는 말입니다. '인정한다'는 말은, 우리가 승인 한 바를, 받아들이고 공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난관, 질병, 재앙으로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러한 곤란이 야기됨을 인정하고, 우리의 삶을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한 단면이라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일에 대하여, ‘감사함'이 없이는 진정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감사'를 드리는 일은,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고는 드릴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감사’와 ‘기쁨’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닌, 바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관계하신다'는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께 ‘찬양드린다’는 의미를 잘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성경에 쓰여 진바 그대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주를 찬양하면 항상 곧, 기뻐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체험 할수 있습니다.

 

 

“난 도대체 이해가 안돼”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난, 주님을 찬양하려고 노력하지만, 요즈음 나의 신변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에, 하나님이 직접 관계하시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야”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하고 어떤이는 이곳에 머물러, 더 전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해’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지 않은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해’에 대한 완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라는 말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용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들 신앙을 훌륭히 다져 줄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를 할수 없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를 알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단지 이 곤경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이 찬양하는 길 뿐이라면 주님을 찬양해야지” 이런 것은 찬양이 아닙니다.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속여 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그러한 거짓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를 하면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 주어진 환경을, 하나님께서 왜 주시며, 어떻게 주시는가 알아내려할 때, 우리의 이해는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그 방법과 뜻을 우리는 이해할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다’ 는 것을 이해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찬양의 기반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계획을 마련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지금 당신은 곤경에 처해 있습니까? 그런 곤경이 당신에게 오는 까닭을 알고자 노력해 본일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에게 유익하게 하기위해 그런 환경을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여 이해하고자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부여 하신 것을, 주님께 찬양하며 신중히 잘 생각해 보십시오.

 

 

▶ 한부부가 내가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동요되어 집에 돌아갔습니다. 몇 달 동안 이들 부부는, 정신과 병원에서 정신병으로 진단을 받은 딸로 인하여 고민해 왔습니다. 전국의 기도 모임에 딸을 위해 기도를 요청하였고, 부모는 매일 무릎을 꿇고 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만 그의 딸은 여전했습니다.

 

그들의 딸의 상태를, 주님께 찬양하라는 말에 그들 부부는 마음이 산란해지고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같아요.”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이 상태에서 찬양한다면 우리 딸을 고의로 다치게 했다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내가 가진 사랑하는 하나님의 개념과 들어맞지 않는군요”

 

“옳지 않은 일 같군. 그렇지만 그 목사님 말이 맞으면 어쩐다?” 하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아내는 멍하니 남편을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손해 보진 않겠지?” 남편은 생각에 잠겨 말했습니다. “한번 노력해 봅시다.” 그들은 같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남편이 기도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저희는 주님이 저희를 사랑하시는 것과, 저희의 딸을 저희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딸을 위해 가장 보람있는 생활을 준비하고 계신줄 믿사옵니다. 그러므로 딸의 질병을 주님께 감사하옵고, 도저히 손을 쓰지 못하는 의사에 대해서 또한, 주님께 감사하옵나이다. 당신이 우리를 향한 사랑과 지혜에 주님께 찬양드립니다.”

 

 

그날 기도를 오래함에 따라 점점 하나님께서, 딸의 삶에 가장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정신병원 의사가 전화를 했습니다. “선생님, 딸이 큰 차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2주일이 못되어 그 딸은 퇴원을 하였습니다.

 

 일년후에 한 젊은 청년이, 집회가 끝난 뒤에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퇴원한 여자의 오빠라고 말하고, 그녀가 이제 결혼을 했으며 아이를 가지고, 아주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고 전했습니다.

 

 

▶ 어떤 어머님 한분이 찾아와서, 야간 ‘고고클럽’의 댄서로 일하는 자기의 딸을 위하여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딸의 그런 상태를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녀는 놀라서 나를 바라 보았습니다. “말도 안됩니다. 예의범절을 무시하고 종교를 비웃는 아이를, 주님께 감사 할수 있습니까? 정말이지 딸의 그런 모습을 사탄에게 감사한다면 몰라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는 안됩니다.”

 

그 어머니의 입장은, 참 어떤 쪽을 택할지 난처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날까지 선한일은 모두 주님께 감사했으며, 나쁜일은 사탄을 저주하는 것으로 일관해왔습니다. 나는 그녀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이에게, 모든일을 선으로 베풀수있는 주님의 능력과, 우리의 생활이 비록 비통해도 관계가 없이 범사에 감사하기를 원하신다는, 구절을 찾아보았습니다.

 

“당신의 딸의 그러한 현상이, 사탄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만 당신의 신앙부족으로, 놀라우신 하나님이 계획하신 당신 딸에 대한, 완전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당신 딸의 삶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 입니다.”

 

결국 그 어머니는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이런 방법을 택하면 어찌되는가 이해는 못합니다만, 주님이 그가 행하시는 일을 알고 계심을 믿고 주님께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는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녀의 마음속의 모든일에 대하여, 참 평안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이제 와서야 처음으로 딸 걱정을 하지않게 되는군요.”하고 말하고 그녀는 웃어 보였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나에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던가를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그녀의 딸이 거의 나체상태로 작은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 한 젊은 청년이 나이트클럽으로 들어오더니,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똑바로 그녀를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시오!” 클럽댄서를 하면서, 그녀는 젊은이들로부터 별의별 소리를 다 들어 보았지만, 이런 말은 처음인 것 입니다. 그녀는 무대에서 내려와, 젊은 사람과 마주앉아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그는 그가 길을 걷고 있는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곳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추는 사람에게,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선물로 주겠노라는 이야기를, 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놀라움에 차서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선물을 받아야 겠군요.” 그리고 그녀는 그 나이트클럽 바로 그 테이불에서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이나 혹은 성공을 위한 부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히 주님의 말씀에 의거한,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결과를 예상하고 찬양을 드려서는 안되며, 지금 처해있는 바로 이 상태에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의 상태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한 온전한 의지의 한부분임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됩니다.

 

 

찬양은, 미래에 어떤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거나, 생각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을 찬양할 때,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예상하면서 찬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곳, 이 상태에서 주님계심을 찬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정직하게 주님을 찬양할때에, 그 결과로 일어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의 능력이, 명백히 우리의 현실속에 흘러 들어와서, 조만간 우리 주위가 변화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찬양의 결과이지, 이것을 바라고 찬양해서는 안됩니다. 찬양은 거래가 아닙니다. “주님 저를 축복 받게 하고자, 주님을 찬양합니다.”하는 마음으로 찬양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주안에서 우리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순서의 중요성에 주의 하셔야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미리 짜놓고, 그것을 구하려고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주님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진심으로 기뻐한 일을 체험하였다면, 다른 모든 것이 부차적인 것으로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주님의 뜻이며,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바 인 것입니다. 먼저 범사에 주님과 함께 기뻐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요?

 

 

▶ 어떤 크리스챤 부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아들은 그들의 자랑거리이며 또 즐거움이 되고 있었지요. 그 아들은, 부모와 함께 살면서 온화하고 즐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그들과 저녁을 같이 하고 있을 때, 그 부부는 나에게, 그들의 큰아들은 대학을 우수하게 졸업하였지만, 부모와 기성사회에 반발하여 생의 뚜렸한 목적도 없이, 히피가 되어 시골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울해 보이는 그들 부부는, 나에게 조언을 부탁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들을 주셔서, 그의 구원을 요구하는 두 부모의 기도에, 대답하고 계심을 믿는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만일 두 분의 기도가 진실하다면, 아들의 이와 같은 삯이, 하나님께서 당신들과 또 그 아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알고 계심을 확신하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들이 잘되기만을 바라고 있으며, 이것이 주님이 우리들 모두를 위한, 그분의 방법이며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저녁식탁에서 서로 손을 잡고, 주님의 최선의 방법으로 그분의 계획을 행하고 계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후로 두 부부는 안심하며 새로운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 모임 이후로 두 부부는 그들이 잘 이해 할수 없었지만, 꾸준히 주님께 아들의 삶에 대하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큰아들은, 오토바이 사고를 내어 다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잠시 불구자가 된 그는, 얼마간 집에 돌아와 있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그가 시골 여러 곳에 진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 부부는 그 일로 기도하고, 이모든 사건에 주님이 관계하신다면 주님께서는, 그 청구서를 갚기 바라신다고 결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채권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사하면서, 그 빚을 다 갚아 주었습니다. 그 아들은 놀랐습니다. 그는 꾸지람을 듣고, 자기 빚은 자기가 다 알아서 갚으라고 할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의 부모는 침착하고 자애로웠으며, 그의 비뚤어진 옷과 흐트러진 머리를 받아 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오후 몇몇 젊은 그리스도 청년들이, 둘째 아들을 심방하러 그의 집에 왔습니다. 큰형은 그들이 찾아오는 것이 심히 못 마땅하였지만, 발이 아파서 집을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행적과, 우리의 생활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에 대하여,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처음에는 큰 아들은 그가 말하는 바, 그들의 천진성과 생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에 대하여 통열히 비판하였으나, 곧 그는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무엇인가 알아보려고 질문도 하였습니다. 그 날 오후가 채 가기도 전에 그는 그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삶이, 너무도 빨리 그리고 완전하게 바뀌었다고, 기쁨에 차서 편지를 하였습니다. 큰아들은 그의 몸을 바쳐, 주를 따르며 주를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성령세례를 자원하여 받았으며, 예수님 부활이후 첫 오순절 날, 예수님의 제자가 겪었던 경험을 하였습니다.

 

수개월 동안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드린 기도는, 이 젊은 청년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 부모가 주님을 향해, 그의 지금의 생활을 즐겁게 받아 들였을 때, 비로소 주님이 그들 모두를 위하여 계획하신 것을, 실현하도록 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나의 생활에,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때로 주위의 환경을 돌아보고, 영원히 이 상태를 못 면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구하면 구할수록, 그러한 괴로움은 누적됩니다. 그 모든 재앙을 없애 달라는 기도 대신, 우리가 처해있는 현 상태를, 주님께 찬양할 때에 비로소 그 전환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 한 젊은 여자가 나에게 편지로, 그녀가 진퇴유곡에 빠졌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떤 난감한 개인적 환경에 빠져서, 그녀는 자제심을 버리고 그녀의 외모를 소홀히 했습니다. “저는 화가 나면 뭐든지 먹어요.”라고 그녀는 편지에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몸이 점점 불어나서 급기야는, 배만 불룩해서 서커스 광대 모양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더니, 어느날 이혼하자고 하면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청구계산서는 점점 축적되고, 그녀의 신경은 예민하게 되어 자살하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때까지 저는 계속 기도했습니다. 저는 성경책을 읽었고, 교회문 만 열려있으면 찾아가서 아는 사람에게 마다,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교회친구들은 계속해서 “신앙을 잃지 말아요.” “환경에 짓눌리면 안돼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예요.”등의 말을 해 주었지만, 일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책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읽었지만, 처음에는 당신이 그토록 진실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나에게 나의 주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읽어 나가는 동안 눈물이 점점 쏟아져 나왔습니다. 천천히, 당신이 말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범사에 주님께 감사하라는 성경구절은, 제가 성경에서 헤아릴 수없이 여러번 읽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모든 일에 주님께 감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더 이상 무엇을 손해 보겠습니까? 그녀의 몸무게는 매우 빨리 불어나서, 언젠가 심장병이 걸릴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꺼져가는 희망을 안고 그래도, 그녀는 기도하려고 거실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저의삶이 이러한 것을 당신께 감사합니다. 제가 겪은 모든 문제는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제가 지금 바로 이러한 상태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는 만일 이러한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십니다. 주님 거짓이 아니오라, 주님이 진정으로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그녀의 기도는, 우체부에게 크게 짖어대는 개소리로 인하여 중단 되었습니다. 매일 같이 그 개는, 그녀의 집에 오는 손님에게 마다 사납게 짖어댑니다. 그 사소한 개짖는 소리도, 그녀를 격노케해서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끌은, 작은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녀가 늘 하듯이, 날카롭게 소리쳐서 개를 조용하게 하려고 일어나 문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범사에 주님께 감사해야지.”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주님, 짖어대는 개를 주님께 감사합니다.”그녀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우체부는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편지 겉봉에 아주 낮익은 필체가 눈에 뜨었습니다. 이럴수가 있나요? 그 여자는 수개월동안 남편소식을 한번도 듣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 시각에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꺼내어 읽었습니다. “당신이 아직도 원하고 있다면, 둘이서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해 봅시다.”

 

하나님이 원하신 때는 완전했습니다. 이 젊은 여자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삶에 역사하시어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녀의 몸무게는 뜨거운 접시위에서 버터가 녹듯이,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그녀의 친구 들은 “너 정말 멋지구나. 어쩐일이니? 도저히 딴사람 같은데?” 하며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달라졌을까요? 그렇다고 할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은 전과 그대로이므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 그의 속사람은 전혀 새로운 신앙의 차원에 살며,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일에 관련하시어 선을 행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되돌아왔고 둘은 다시 재결합하였습니다.

 

 그녀는 편지에 “어떤 때에도 아침에 깨어날때, 제가 주님께 ‘주여 멋진 하루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라고 적어 보냈습니다. 그녀가 현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서 전환점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활동이 행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아주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현 상태를 하나님계획의 한부분이라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그의 계획의 다음 단계를 행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도, 하나님의 행하심이지 우리의 행동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사실을 부인하려 합니다. 그들은 범사에 주님께 찬양하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변화를 보고, 그 변화는 간단히 설명할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웃으면 세상이 다 즐거워지고, 울면 당신 혼자 괴로울 것입다.”라는 문구에는 동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의 자세를 변화 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습니다.

 

 

찬양 따위의 말에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우리의 자세에도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종종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에게 어떤 기도의 형태를 외우기만 하면, 우리에게 능력이 생겨서 그 상태를 바꾸고 조작할 수 있다는, 사고의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신실한 마음으로, 우리의 상태를 감사하며 받아들이고 이러한 환경은,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확신할때에, 우리 주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환경속에 스며들어오며, 자연적인 사건의 진행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 내가 ‘죠지아’주의 ‘포오트 베닝’에서 군목을 맡고 있을 때입니다. 어떤 젊은 군인이 아내를 데리고 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아내는 LSD의 무서운 환각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고, 의사도 고칠수 없다고 단념을 했습니다. 공포와 고통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깊은 주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저는 잠을 잘수가 없어요.” 하고 그의 아내는 말을 하였지요.

 

 “단 일분이라도 눈을 감고 있으면, 무시무시한 짐승이 달려드는 것이 보여요.” 젊은 군인은 그의 아내가 매우 피곤하여 잠이 들면, 그때마다 그녀는 즉시 비명을 지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아내를 흔들어 깨우려 하지만, 아내가 의식을 차리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요. 어떤때는 10분이 넘을 때도 있지요. 그 사이에 아내는 번민에 차서 소리를 지르고, 저도 그 소리에 맥이 풀리고 맙니다.”하고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 슬픈 이야기를 다 듣고 이야기 했습니다.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제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와 함께 무릎을 꿇고, 당신이 그러한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그들 부부는 내 말이 진정은 아니겠지 하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조심스럽게 나는, 범사에 감사하기를 주님이 바라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설명해 주었습니다.

 

“당신을 바로 이 자리에 있게 하기위하여 이제까지 여러 사건이 당신에게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분은 이제 당신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자,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께 나오게 한 모든 일들에, 감사하기를 바라십니다.” 나는 성경을 펴서, 줄쳐 놓은 부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부부는 그들이 들은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생활가운데 일어나는 모든일, 특히 마약에 의한 환각을, 주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는 방안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당신을 지금 이 자리에서 치료하는 역사를 하고 계신다.”고 분명히 밝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여자를 지금 이곳에서 고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녀는 눈을 떴습니다. 매우 놀란 얼굴이었습니다.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났어요. 기도하려고 눈을 감았을 때는 아무런 환상도 보이지 않았어요.”

 

“주님이 당신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당신의 구세주로서 당신의 삶에 들어오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믿겠습니까?” 두 부부는 진심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 주님이 들어오시기를 원하는 기도를 한 후에, 그들은 즐거워하며 사무실을 나갔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환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정신에 미치는 마약의 힘은, 주님의 능력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런 종류의 변화는 개인의 자세가 바뀌거나, 혹 자기의지의 결정적인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애가운데 행해지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어떤 형태든지 진정으로 신실하게 기도드리면, 문을 열어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속에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찬양의 기도가, 다른 청원의 기도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사실을 제삼 제사 설명해 주는 구절이 성경에 있습니다. 시편22:3절에서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는 말씀을 읽을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때에, 주의 능력이 나타나심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우리의 찬송중에 거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때에,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이, 역대하 20장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유대의 왕이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그의 성이, 모압자손과 암몬자손 또 마온사람들의 적에 의해 포위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사밧은 유대인의 적은 힘으로는, 감당할수 없을 줄 알고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오는 이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 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대하20:12)

 

 

주님을 찬양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을 위태한 환경에 두지 말고, 대신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그의 왕국이 위험하다고 눈을 감아버리거나, 적이 거기 없겠지 하고, 가정하는 따위는 하지 일체 않았습니다. 그는 주의 깊게 상황을 흝어본 후에, 그의 무능함을 깨닫고 주님께 도우심을 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활에 역사하고 있는, 악마의 위협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볼 때, 그것으로 주님께 찬양해야 됨을 깨닳아서, 그러한 현상속에서 완전한 통제와 권위로 일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렇다고 우리 주위에일어나는 악의 출현에, 선입관을 가져서는 안되겠지오. 그러한 악의 출현을 통찰하고,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그것에 대적할수 없음을 깨달아서, 주님께 의존하십시오.

 

 

하나님은 여호사밧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 나는 이것이 매우 놀라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생의 환경을 개선해 나갈 힘이 없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당신이 이 싸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위치를 지키시고 가만히 서서 주님의 구원을 목격하십시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이 서서 하나님의 일을 보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기를 원하셨습니까?

 

다음날 아침 여호사밧은 그의 군대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셨더니”(대하20:21)

이러한 장면이 유대인을 죽이려는 적군의 무리앞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싸움터에서 노래하는 사람의 무리가 나타나 적과 대처할 때, 적의 장병이 어떻게 생각할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수 년 동안 군목으로 지냈으므로, 전쟁 준비를 하는 병사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군대에게 적 앞에 가만히 있으라하고, 특별가수가 앞으로 나와 노래부르게 하는 식의 장군은,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참 기이한 착상 같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들이 이해하는데 저해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곤경에 처해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옳고 좋은 일이지만,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되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거야. 적어도 우리가 뛰어 나가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여 활발히 싸우고, 그다음은 주님께 맡겨야지” 하며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호사밧과 그 부하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저희가 피차에 살육하였더라.”(대하20:22-23)

 

나는 그 당시 여호사밧이 “주님께서 안전하게 도우실꺼야.”하며 부하에게 명하여 싸움을 할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매우 곤란했을 것입니다. 우리 중 수많은 사람이, 우리 주위환경과의 투쟁을, 하나님것이 아니라 ,우리의 투쟁이라고 생각함으로, 줄곧 패배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적과 싸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능력에 의존하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들의 위치를,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래서 믿을 용기가 안나.”하고 말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분명히, 그러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신앙의 단계에 들어서는 일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헛되지 아니하심을 믿고 그 말씀을 받아 들여서,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이 말씀이 명확히 나타나있습니다. 받아들인 후에 이해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인간의 이해력 너무 빈약하여, 거대한 그분의 계획과 창조의 목적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해한 후에 받아들이려 한다면, 그것은 필요없는 일입니다. 여호사밧이 만일주님의 계획을 이해하려고 했다면, 그는 싸움터에서 용감히 주님의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의와 그 약속은 애매한 것이고, 그가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우리가 성경에서 알았듯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적 차원에서 깨달아, 주님께 의존하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여호수아도 싸움터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이해력으로는 풀 수 없는, 그의 의지를 시험하는 듯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보는 이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줄을 지어, 엿새 동안 여리고 성을 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째 날에는 양각 나팔을 불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여리고 성은 튼튼하게 보루가 쌓여 있었고 40년이나 광야에서 헤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을 뺏을 만한 무기나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그들의 손으로 적을 몰아내시겠다는 언약을 믿었습니다. 여리고의 성벽은 정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양각나팔과 소리로 주님을 찬양하여, 그들의 신앙과 신뢰를 보여 줄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와 여호사밧의 예가, 뚜렷이 보여주듯이 주님은 인간의 지혜와 책략과는 상반되고, 우리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원리와 방법으로 승리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며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행하심을 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보내신 짧은 기간 동안 보여 준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은 아무것도 할수 없노라고 시인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완전한 복종, 신뢰,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 시킬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곤란에 처해 있을 때 하신, 기도의 예를 몇가지 알아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도성에서 오천의 사람들이, 그를 따라 나온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는, 어떤 소년의 점심,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라고 요구하셨나요?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막6:41-4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요14: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 할수 있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 오심을 예언하고, 예수님은 “기쁜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며...마음이 상한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모든 슬픈자를 위로하되...희락의 기쁨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사61:1-4)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위의 말씀에서 당신의 상태를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마음이 상한 자입니까? 육체적 정신적 한계와 질병에 매여 있습니까? 감옥에 갇혔거나 영적인 무지로 감금되어 있지 않습니까? 슬프지 않습니까?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 할수 없으십니까? 당신의 영혼이 고통받고, 패배 당합니까?

아마도 그것은, 당신께서 예수님이 가져온 복음을, 순전히 받아들여 이해하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이세상의 우리 삶 가운데에 역사하셨으며, 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행함을 알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주님이 하신일이나, 하시고 계신 일에 미혹을 품는 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할수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의혹은, 항상 주님을 찬양하는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주님께 감사하기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가짐이 든든하고, 의심이나 의혹의 금이 가있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찌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56:3-4)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57:7) 할렐루야!!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글쓴이 : 사랑! 원글보기
메모 :